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 (문단 편집) === 영향력 === 5.18 광주민주항쟁은 [[한미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것 때문에 [[로널드 레이건]]이 [[전두환]]에게 거부감을 보이거나 한미 관계에 영향을 끼쳤을 정도였고, 이런 미국의 태도는 [[김대중]]의 석방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정상회담 교섭의 실무를 맡았던 손장래 전 주미공사는 4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해 당시 비공개 접촉을 회고하며 '''"미국 측은 [[로널드 레이건|레이건]] [[미국 대통령|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어떻게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손에서 피가 흐르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느냐'며 정상회담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 >'''정상회담 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그는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 전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구명 문제를 에둘러 언급했고 당시 앨런 [[보좌관]]이 이를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귀띔해 비공개 접촉 1달 만에 [[정상회담]]이 성사됐다고 설명했다. 이 정상회담을 계기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감형을 받고 1982년 석방됐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81&aid=0002323967|"김대중 살려주면 전두환 美 국빈방문 허용 '韓·美 정상회담' 거래 있었다"]] 이후로도 로널드 레이건에게 전두환의 이미지는 좋아지지 않은 듯, [[알츠하이머]]로 인해 전두환을 기억해내지 못하자 참모들이 간신히 설명해주는데 이때 한 말이 '''"아, '학생들은 죄다 [[공산당]](빨갱이)'이라고 했던 그 친구!"'''였다. 레이건 역시 [[매카시즘]]으로도 비판받았던 대통령인데, 그런 레이건에게조차 전두환은 [[허언증|얼토당토 않는 소리하는]] 인간으로 기억됐던 것. 대한민국의 운동권이 [[반미]]주의로 돌아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운동권]]은 [[친미|미국에 매우 호의적이었는데]], 도덕주의를 앞세운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가 박정희 군사정권과 노골적으로 날을 세우면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5.18 당시에는 고유가 등으로 지미 카터 정권의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면서 근 반세기 [[미국 민주당]] 최초로 연임이 좌절될 사태 앞에 놓이게 되자 적극개입을 꺼렸다. 특히 미국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급 항공모함|코럴시]]함이 5.18 당시 [[부산]]에 입항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소식이 알려지자 광주에 갇힌 시민들은 미국이 민주주의를 응원하고자 항공모함을 파견했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미드웨이급 항공모함|코럴시]]함은 단지 계엄군이 시민군과 대치하는 사이에 [[조선인민군|북한군]]이 남침하지 않을까 우려해서 [[E-2|E-2A]] 공중 조기경보통제기를 경계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파견된것 뿐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는 직접 피해를 입은 광주시민들은 물론, 나중에 5.18 민주화운동을 해외언론이 보도한 내용을 반입하여 [[비디오]]로 돌려보면서 파악한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큰 충격과 배반감을 안겼다.[[https://kjmbc.co.kr/article/iZNaiCRiKLN|33년 전 오늘 리포트9 - "미국을 믿었는데..."]] 이는 곧 미국이 광주에서의 학살을 알면서도 막지않고 묵인했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승인했다는 설으로 커져나갔는데, 특히 당시 미국 사령관의 작전권하에 있던 20사단이 광주로 왔다는 사실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믿어졌다. 이후 재판과정에서 외교부 문서가 일부공개되면서 사실상 용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https://www.youtube.com/watch?v=hWvB8uAvLrs|"미국이 5.18 무력진압 용인했다"..미 국무부 비밀문건 첫 확인]] 이후로 1982년 3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1985년 5월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을 시작으로 적극적으로 미국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들로 나타나게 되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이 전개되기 전날인 1980년 5월 26일 “우리(미국)는 광주를 재점령하기 위한 군사작전이 오늘 밤 자정을 전후해 시작될 것이라는 믿을 만한 정보들을 입수했다”고 미국 백악관 상황실에 보고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광주의 무법 상황이 장기화되는 데 대한 위험성을 인지했기 때문에 (군부에) 군사작전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백악관에 알렸다.[[https://m.kmib.co.kr/view.asp?arcid=0923533820|#]] 한편 광주광역시에서는 지금도 미국에 대한 원망이 유족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남아있는 중이다. 또한 당시 국민들의 인식에도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실제로 5.18 민주화운동은 [[5.16 군사정변]]과 달리 전두환의 [[정통성]]에 심각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심지어는 [[5.16 군사정변]] 당사자조차 '''내란 세력이 저지른 짓이라고 인식할 정도였다.''' >김종필, 김재춘, 김계원, 장세동 씨 등 10여 명이 둘러앉았다. 전두환 씨는 불참. >국회가 화제가 되고 얘기는 80년 광주 문제로 옮아갔다. >[[장세동]](전두환 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장 경호실장) 씨가 광주 사태는 [[진주민란]]이나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이라는 취지로 80년 5월의 광주 상황을 설명해갔다. 그러자 '''[[김재춘]] 씨(3代 정보부장)가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성격 그대로 "무슨 그따위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요.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팩트폭력|당신네들이 총칼 들고 정권 잡아가지고 저지른 짓을]] 무슨 [[홍경래]] 반란이라고?" 하며 내쏘았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분은 웃으며 일어서면서 "국회에서 특위 조사할 것도 없이 결론이 이미 나와 버렸군" 하여 웃고 헤어졌다. (당시의 한 참석 인사) >---- >동아일보 1992년 10월 10일자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글) 112회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10100020921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10-10&officeId=00020&pageNo=11&printNo=21966&publishType=00020#|<전두환 '대권 각본' 밀어붙이다>]] [[5.16 군사정변]]에 가담할 정도로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3대 정보부장도 저랬으니, 일반 국민들 사이에 퍼진 인식은 어땠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참고로 김재춘의 발언이 들어간 부분은 [[5.18 민주화운동/왜곡/무장폭동설|본 문서의 하위 문서]]에도 나오는 부분으로 하위 문서에 나온 부분은 2012년에 출간된 개정판의 내용이며, 이 문서에 나온 부분은 1992년 당시 신문연재본이나, 이 부분의 내용은 양자가 동일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